외로운 도시

🔖 나는 고독에 머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자체가 하나의 도시라는 것을. 맨해튼처럼 엄격하고 논리적으로 구축된 도시라 할지라도, 도시에 머물게 된 사람들은 처음에는 길을 잃는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좋아하는 장소와 선호하는 경로들이 집합된 정신적 지도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복제하거나 재현할 수 없는 미궁이다. 그 시절 내가 만들었고 지금도 계속 만들고 있는 것은 내 경험과 타인들의 경험으로 채운 고독의 지도다. 나는 외롭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것이 삶에서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지 알고 싶었고, 고독과 예술 사이의 복잡한 관계의 지도를 그려보고 싶었다.

🔖 내가 어떤 모습인지는 알고 있었다. 호퍼의 그림 속 여자들 같은 모습. 아마 <오토매트Automat> 속 여자. 클로슈 모자에 녹색 코트를 입고, 검은 어둠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두 줄기 불빛들이 반사되는 창문을 뒤로 하고, 커피잔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 아니면 헝클어진 머리를 틀어 올리고 침대에 앉아 창문 너머로 펼쳐진 시내를 바라보고 있는 <아침 해Morning Sun> 속 여자. 아름다운 아침, 햇살이 벽을 씻어내리고 있지만, 그녀의 눈과 턱에는 뭔가 황량한 기운이 배어 있고 가느다란 손목은 다리 위에 교차되어 놓여 있다. 나는 바로 그런 모습으로, 구겨진 침대 시트 위에서 표류하며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그저 계속해서 숨만 쉬려고 애쓰면서 앉아 있다.

🔖 가끔씩 어떤 경험을 정확히 표현하는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굳이 의식하거나 자신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표현이 너무 예지적이고 강렬해서 그 경험과의 연관성이 지워지지 않는다. 호퍼는 자기 그림이 어떤 주제로 규정될 수 있다거나, 고독이 자신의 전문 분야 또는 중심 주제라는 생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고독이라는 건 남용되었어.”

🔖 "호퍼가 그린 도시 풍경들은 고독의 핵심 체험을 복제한다. 벽에 에워싸여 고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동시에 거의 견딜 수 없을 만큼 노출되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 "본질적인 형태의 고독은 그것을 겪는 사람이 알려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알려줄 수 없는 여느 감정 체험들과 달리 그것은 공감을 통해 공유될 수도 없다. 제1 인물의 고독이 밖으로 표출될 때 주위에 불안을 조성하는 성향 때문에 제2인물의 공감 능력이 저하될 수도 있다.”

🔖 “그는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만들었고, 받을 수 있는 온갖 비난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중화했다. 아무도 그를 '어설프게 모방'할 수 없었다. 그 자신이 벌써 다 모방해버렸으니까.” 비판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 모두가 하는 일이지만, 워홀이 자신의 결점을 강화한 열성과 철저함의 수준에는 도달하기 어렵다.

🔖 <소, 소설>은 말이 연결되기 위한 최단 경로는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고독이 친밀함을 향한 욕구라고 정의된다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은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 말을 누가 들어주고, 생각과 경험과 감정을 공유해야 할 필요다. 친밀함은 관련된 자들이 자신을 알리고 싶다는, 드러내고 싶다는 의사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로 드러내야 할지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충분히 소통하지 않고 타인들에게 숨겨진 상태로 있거나, 아니면 너무 많이 드러냄으로써 거부당할 위협을 무릅쓰거나. 크고 작은 상처, 지루한 강박, 필요와 수치심과 갈망의 질병. 나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지만, 가끔은 누군가의 팔을 붙들고 모든 일을 불쑥 말해버리고 싶었다.

🔖 <칼날 가까이>가 출판된 지 아직 얼마 안 된 때였으므로, 대화가 끝날 무렵 골딘은 워나로위츠에게 그의 작품에서 가장 이루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사람들이 소외감을 덜 느끼게 하고 싶어. 나에게 제일 의미 있는 건 그거야." 그가 말한다. "이 책 내용 가운데 일부는 오랜 세월 동안 내가 다른 행성에서 왔다고 믿으며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데서 느낀 고통이라고 생각해.” 1분 뒤 그는 덧붙인다. "우리는 서로가 소외감을 덜 느끼도록 충분히 열려 있음으로써 모두가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어.” 이 말은 내가 그의 작품에서 느끼는 것을 정확하게 요약한다. 내가 느끼던 고립감을 그토록 잘 치유해준 것은 날것 그대로인 그의 표현과 취약함이었다. 즉 실패나 슬픔을 기꺼이 인정하려는 태도, 접촉을 허용하는 태도, 욕망과 분노와 고통을 인정하고 감정적으로 살아 있으려는 태도가 나를 치유해주었다. 그의 자기 노출은 그 자체로 고독을 치유하는 방법이었고, 자신의 감정이나 욕망이 유달리 수치스럽다고 믿을 때 생기는 이질감을 해소해준다.

(…)

그를 사랑하면서 나는 남자들이 무기를 내려놓도록 서로에게 권유하는 것을 보았다. 그를 사랑하면서 나는 다른 남자들이라면 평생토록 채워야 할 구덩이를 소도시의 노동자들이 만들어내는 것을 보았다. 그를 사랑하면서 나는 석조 건물의 동영상을 보았다. 나는 감옥에 있는 손 하나가 창턱에서 눈을 치우는 것을 보았다. 그를 사랑하면서 나는 소용돌이치며 기다리고 있는 바다로 곧 미끄러져 내려갈 거대한 집들이 세워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내면의 삶의 고요에서 그가 나를 해방해주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선언을 사랑했으며, 마지막 문장을 특히 사랑했다. '나는 내면의 삶의 고요에서 그가 나를 해방해주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섹스의 꿈 아닌가? 신체 그 자체에 의해 신체의 감옥에서 해방되리라는 것, 그 낯선 언어가 드디어 이해된 것이다.

🔖 오후 1시, 의사당 계단에는 사랑하던 사람들의 유골을 갖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조지 부시가 수장으로 있던 백악관을 향해 행진했다. 백악관에 닿자 그들은 잔디밭에 재를 부었다. 유골함이나 비닐봉지를 거꾸로 들고 철조망을 통해 잔디밭에 재를 쏟아부었다. 그들과 함께 데이비드 워나로위츠의 재도 연인 톰의 손으로 뿌려졌다.

워나로위츠는 생전에 운동화를 신은 조니 애플시드처럼 커낼로의 상점에서 풀씨를 사서 부두를 돌아다니며 한 줌씩 흩뿌리곤 했다. 뭔가 아름다운 것이 폐허 부스러기를 뚫고 피어나지 않을까 해서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의 사진은 그가 출항장이나 버려진 짐 더미 중 한 군데에 뿌린 씨앗에서 돋아난 풀밭 위로 빈둥거리는 모습이 담긴 것이었다. 풀과 잔해들이 섞여 흩어져 있고, 부스러지는 석고와 흙덩이 사이로 풀이 자란 모습이 보인다. 이는 익명의 예술, 서명할 수 없는 예술, 변형에 관한 예술, 그저 쓰레기에 불과했을 것을 연금술처럼 바꿔놓은 예술이었다.

🔖 예술이 할 수 없는 일은 너무나 많다. 죽은 이를 도로 살릴 수도 없고, 친구들 사이의 다툼을 말려주지도 못한다. 에이즈를 치료하지도 못하며, 기후 변화의 속도를 늦추지도 못한다. 그렇기는 해도 예술은 아주 비상한 기능을 한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을 중재하는 기묘한 능력이다. 그것은 친밀성을 창조하는 능력이 분명 있다. 예술은 상처를 치유하면서도 모든 상처에 치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모든 흉터가 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내 말이 고집스럽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내 경험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뉴욕에 처음 왔을 때 나는 부서진 상태였다. 그런데 심술궂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일체감을 회복한 것은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또는 사랑에 빠짐으로써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을 만나봄으로써, 이 연결을 통해서, 고독과 갈망은 그 사람이 실패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살아 있음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을 서서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진행되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있고, 감정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균질화하고 표백하고 영향력을 죽여버리는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한다. 화려한 후기자본주의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모든 힘든 감정, 말하자면 우울, 불안, 고독, 분노가 그저 불안정한 화학적 결과일 뿐이며 고쳐야 할 문제점이라는 생각을 주입당했다. 그런 감정이 구조적 부당함 또는 데이비드 워나로위츠가 인상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온갖 슬픔과 좌절이 줄줄이 딸려 있는, 빌려 쓰는 몸뚱이로 살아가야 하는 데’ 대한 자연적인 반응은 아니라고 말이다.

고독이 반드시 누구를 만남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 가지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법을 배우는 것, 또 하나는 개인으로서의 우리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스티그마와 배제라는 더 큰 힘이 낳은 결과임을, 그래서 저항할 수 있고 저항해야 하는 대상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고독은 사적인 것이면서도 정치적인 것이다. 고독은 집단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도시다. 그 속에 거주하는 법을 말하자면, 규칙도 없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다만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가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지는 의무를 짓밟지도 면제해주지도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뿐이다. 우리는 상처가 켜켜이 쌓인 이곳, 너무나 자주 지옥의 모습을 보이는 물리적이고 일시적인 천국을 함게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 서로 연대하는 것, 깨어 있고 열려 있는 것이다. 우리 앞에 존재했던 것들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감정을 위한 시간이 영영 계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